예루살렘에서 살라

왕상 2:36-46

주일설교말씀

우리는 다윗 왕을 잘 압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실수도 있었고 죄악도 범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은 늘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었기에,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복과 은혜를 더하셔서 나라가 태평성대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시대처럼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다윗도 땅에서의 생명을 다하는 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훈이라고도 할 수 있고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최후의 부탁을 남기고 40년 치세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다윗의 유언은 왕상 2:1-11절에서 볼 수 있는데, 이를 4가지로 요약하면, ①하나님의 법과 규례를 잘 지켜 행하라, ②요압을 경계하며 지혜롭게 행하라, ③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라, ④시므이를 경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새로 왕이 된 솔로몬은 몇 가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했는데, 먼저는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 반역하였던 아도니야를 처형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2:13-25절에서 소개되는데, 대강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다윗 왕이 늙어 기력이 쇄하였을 때, 아비삭이라는 젊은 여인이 다윗과 함께 살면서 다윗을 보살폈는데, 다윗이 죽은 후에 아도니야는 그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아버렸습니다.

당시의 전통으로 보면 왕을 내조하며 섬기던 여인은 차기 왕을 계속 수종들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도니야는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안 그런 척하여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를 속여 아비삭을 자기의 아내로 삼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기가 왕이 된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는 이미 왕이 된 솔로몬에게 반기를 든 반역행위였기에, 솔로몬은 쓴 뿌리를 낸 아도니야를 아픈 마음으로 처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도니야가 반역을 꾸밀 때, 아도니야와 공모했던 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시켰습니다. 아비아달의 파면 내용은 2:26-27절에서 볼 수 있는데, “당연히 죽을 죄를 지었으나 부친 다윗을 도와 주를 섬겼고, 부친이 환난 받을 때도 기꺼이 함께 환난을 받은 사실을 참작하여 죽이지는 않고 파면시켜 고향 아나돗으로 가서 조용히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결말은 이미 엘리 가문이 패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라고 성경 기자는 밝힙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보면서, 한 사람의 잘못이 그 후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과 후손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기를 결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도니야를 처단하고 아비아달을 파면시킨 솔로몬은, 한 가지 더 감당해야 했던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요압을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압 역시 선친 다윗을 위해서 한때 큰일을 했지만, 솔로몬의 형 압살롬을 죽였으며 의인이었던 아브넬과 아마샤도 죽였기에, 선왕 다윗은 2:6절에서 보는대로 솔로몬에게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고 유언했는데, 거기에 더하여 요압 역시 솔로몬이 왕 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겨 아도니야와 역모를 꾸몄기에, 솔로몬은 요압을 처형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이런 굵직하고 어려운 몇 가지 일들을 정리한 후에 본문 36절에서 보는 것처럼 시므이라는 사람을 어전에 호출했습니다. 그리고는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솔로몬이 어전으로 불러낸 시므이가 누구입니까? 그는 사울 왕가의 후손으로,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사울의 왕좌를 찬탈한 것으로 생각하여, 다윗을 원수같이 여겨 오면서 한 때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을 때, 다윗을 따라오면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고 티끌을 날리며 “가거라 가거라”라고 소리 지르던 자였습니다. 삼하 16:5-13절에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는데, 7절만 한 번 보십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이렇게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였으니 그는 다윗의 손에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평정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도할 때에 시므이는 길에 나와 엎드려 자기의 지난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사죄를 청하였기에 다윗은 그에게 관용을 베풀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용서는 참 중요합니다. 용서는 고치지 못할 사람을 고치고,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어느 분이 “물 한 컵의 용서”라는 글을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아마 저희들이 초등학생으로 있을 때쯤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때 학교에서 우유 가루나 건빵을 배급해 주던 시절이 있었는데, 항상 배가 고팠던 몇 몇 학생이 어느 초겨울 오후, 청소당번을 하다가 친구들과 의기투합하여 급식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머니 가득 건빵을 쑤셔 넣고, 또 우유포대에 고개를 들이박은 채 우유가루를 먹었습니다. “콜록, 콜록, 켁켁” 마른 가루를 마구 퍼먹다 보니 마른기침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 하필 창고 옆을 지나시던 선생님께 덜미를 잡혔습니다. “건빵을 입에 물고 운동장을 돌겠구나” 싶어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무실에 불려갔는데, 뜻밖에도 “이놈들아, 마른 가루를 먹다 목이 막히면 어쩌려고. 자, 물부터 마셔라.” 그 말에 모두들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이 다음에 크면 꼭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되겠다”고. 선생님은 회초리 대신 물 한 컵으로 우리를 사람 되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 글은 용서의 힘이란 실로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웰링통 장군의 말썽꾸러기 부하도 용서로 교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용서 받고도 깨닫지 못하고,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시므이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에 대하여 왕상 2:9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라고 경계시켰습니다. 만약에 다윗의 용서를 받은 시므이가 정신을 차리고 살았더라면 다윗이 이런 유언을 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시므이가 다윗으로부터 엄청난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충하고 파렴치한 일을 서슴지 않았기에, 고쳐지기를 기다리던 다윗은 끝내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지혜롭게 처리하라고 유언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유언을 받은 솔로몬은 시므이를 어전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명을 내렸습니다. 36절을 다시 보면, 솔로몬은 시므이를 불러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고 예루살렘에서 살라”고 어명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주거제한령’입니다.

사실 부친 다윗이 솔로몬에게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라”고 하였기에,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죄인이라고 규정한 시므이를 죽인다고 해도 시므이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죽인다는 말’ 대신에 “예루살렘에서 집 짓고 거기서 살라”고 했으니, 비록 그것이 주거제한령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은총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가진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그곳은 온 땅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입니다. 또한 왕이 머무는 도성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나, 왕이 머무르는 이 평화의 도성에서 집 짓고 살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어떤 면에서는 엄청난 특권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경계를 합니다. 37절에서 보는 것처럼 만약 예루살렘을 떠나는 날에는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시므이에게는 주거제한령 이었음으로 부자유스러울 수 있으나, 반대로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내가 달리던 길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나는 멈추어야 하고, 다른 쪽에서 신호 대기하던 차들은 파란불을 보고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통제를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보장받고 안전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규칙대로만 한다면 절대 안전합니다. 그러나 급하다고 빨간불에 달리면 사고가 납니다.

시므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므이가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반대로 시므이가 예루살렘 안에서만 산다면 그는 최상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므이는 38절에서 보는 것처럼 솔로몬이 베푸는 은총 앞에서 “이 말씀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종이 그리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멘”으로 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므이가 예루살렘에서 3년 정도 살고 있을 때, 39절에서 보는 것처럼 시므이의 두 종이 자기를 배반하고 가드왕 아기스에게 도망을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왜 종들이 가드로 도망을 쳤느냐하면, 옛날에 종이 도망치면 주인이 가서 잡아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 시므이의 경우는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게 되어있었기에, 이 사실을 안 시므이의 종들이 가드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안 시므이는 어떻게 합니까? 40절에서 보는 것처럼, 시므이는 두 종을 찾으려고 몰래 자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빠져나가서 그들을 잡아 도로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시므이는 솔로몬 몰래 감쪽같이 일을 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41절에서 보는 것처럼 시므이가 예루살렘에서부터 가드에 갔다가 돌아온 일을 솔로몬에게 알려졌습니다. 이런 일을 두고 “낯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자 42-44절에서 보는 것처럼 솔로몬은 시므이를 호출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였던 사실과, 만약에 떠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던 사실을 들어 이제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고는, 46절에서 보는 것처럼 시므이를 처단하게 하였습니다.

살 수 있는 은총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배반하고 왕을 속인 시므이를 통해서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게 됩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향해 돌을 던지던 죄인이었습니다. 원죄와 자범죄로 얼룩져 있던 구제불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 되신 주님께서 불러주셨고,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떠나지 말아야 할 예루살렘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통치하시는 영역’이 예루살렘이 아닐까요? 전에는 죄를 지으면서 예루살렘 밖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외인이요. 손이요. 소망도, 하나님도 없는 자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거주지가 바뀌도록, 신분이 바뀌도록 하셔서, 이제는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예루살렘에서 사는 하나님나라 시민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 처소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고 있는 자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은총이며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을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마시고 교회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왜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습니까? 오늘날에도 왜 하나님의 통치를 받던 성도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교회를 떠납니까?

  1.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망각성 때문입니다. 39절에서 보셨듯이 ‘3년 후’에 시므이에게서는 어명을 어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의 말씀 처음 받던 날, 그때 누리던 은혜의 감격 속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하나님만 믿고 살겠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어요’ 라고 결심하고 고백하던 그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습니까?

    당연히 그러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대개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망각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또 하나님은 모르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범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사람들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성숙이 없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타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고 성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자신을 성숙시키는 것에 실패하였기에 시간의 흐름 속에 자기 생명을 빼앗기는 타락의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2.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난 것은 이기주의적 자기욕망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종이 도망쳐 갔다고 어명을 어기고 종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자기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종들을 찾기는 했지만 자기 목숨은 잃었습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세상 것 때문에 더 귀한 생명이 망하는 일이 없도록 살아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의 품을 벗어나서 땅의 것을 너무 과도하게 추구하다가 망하였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어기고 욕심을 내다가 망한 아간 같아서도 안 되며, 하나님의 복음을 경시하다가 겨우 팟죽 한 그릇 먹고 장자의 유업을 잃은 에서같이 되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 영혼을 위하여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씩 찬양단과 함께 이런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우리 한 번 찬양할까요?

결론입니다.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살도록 은혜를 입은 시므이는, ①시간의 망각성 속에서, ②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그 은혜의 효력을 지속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심은, 그것을 거울로 삼아 ①너희는 은혜를 놓치지 말고 ②하나님의 백성답게 은혜의 효력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라는 것 인줄 압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교훈이 되고, 힘이 되고, 능력이 되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주보소식

  1. 오늘 새로 오신 분들과 여행 중에 같이 예배하시는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교제 후, 5시 30분부터 청년회에서 “친구초청의 밤” 행사를 엽니다. 청년들은 모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3. 새벽 기도회는 다음주 월요일(23일)부터 재개됩니다. 시간은 6시부터 7시까지입니다.
  4. 금주 여전도회 목요성경공부는 12시부터 김미정 집사님 댁에서 있습니다.
  5. 금주 토요일(21일)은 헤리티지 투어가 있습니다. 담임목사님 댁에서 9시에 출발합니다. 투어 참가자들은 예배 후에 잠시 본당에 모이시기 바랍니다.
  6. 다음주일(22일)은 청년회 헌신예배로 드리며, 예배 후에는 웃음치료사의 특강이 있습니다.
  7. 3월 29일은 셀대항 “촌극 발표회”가 있습니다.
  8. 4월 5일 부활주일은 성례식이 있습니다. 학습이나 세례를 받으실 분은 목사님께 신청 바랍니다.
  9. 4월 11일(토요일)에는 선교바자회가 있습니다. 특별히 후원헌금을 하실 분들을 위하여 다음 주일부터 “선교후원금” 봉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10. 6월 5일(금)~7일(주일)까지 심령부흥회가 있습니다. 강사님은 이정화 목사님이십니다.
  11. 7월 27~31일까지 있는 스노도니아 투어 신청은 오늘까지 송호택 권사님께 하시기 바랍니다.
  12. 교회 부서가 신설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부서장 중심으로 부서에서 해야할 일을 책임성 있게 담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서 편성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자세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13. 심방받기를 원하시는 가정은 셀 리더를 통하여 신청하시기 바랍니다.